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소가 풀을 뜯듯이 #1

+ Downhouse, UK

스톤헨지에는 혼자 가길 잘 했습니다. 여행상품을 쫓아갔더라면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인증샷만 찍고 돌아올 뻔했습니다. 늙은 소와 충분히 대화를 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던 멀린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돌아왔습니다. 숙소 열쇠가 없어 한스에게 전화를 했는데 웬일인지 응답이 없습니다. 다시 잭에게 문자를 하니 잭이 내려와 문을 열어 줍니다.

 

“한스는 자니? 오늘 버스킹은 어땠어?”


그러고 보니 오늘 런던 시내에서 버스킹을 할 거라고 했는데 잘 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요. 오늘 버스킹 못했어요.”
 
“왜? 어제 장소 섭외 다 했다며?”
 
“그게 순서가 선착순이더라구요. 한참 기다렸는데 순서가 잘 돌아오지 않아서.. 비도 오고.. 결국 그냥 들어왔어요.”
 
“그랬구나.. 한스는 그래서 먼저 자는 거야?”
 
“형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봐요.”


한스는 자는지, 기분이 좋지 않은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는 반응이 없습니다. 암스테르담 사건 이후, 한스도 에너지가 넘쳐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여행을 잘 마무리하려고 애써 노력하는 듯 보이긴 했지만, 한스는 은미의 문자 사건부터 해서, 많은 것들을 직면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영국은 뭐랄까? 사람을 직면시키는 묘한 에너지가 있어. 어떤 선택을 하면 그게 잘 됐건, 잘못됐건, 선택한 방향으로 어느 정도 흘러가기 마련인데, 영국은 선택과 상관없이 운명과 직면시켜 버리는 것 같아. 이번 스톤헨지 여행상품 건도 그렇고, 전에 ‘위키드’도 그렇고..


멀린은 8년 전 첫 런던 여행 때,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예매했었습니다. 웨스트엔드에 가면 꼭 보고 싶었던 뮤지컬이라, 런던에 도착한 첫날 바로 예매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매한 날이 되어 공연장을 찾았는데, 입구에서 스탭이 이 티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며 여기가 ‘빌리 엘리어트’ 공연장이 아니냐구 따져 묻는 멀린에게, 스탭은 티켓을 손으로 집어가며 이 티켓은 뮤지컬 ‘위키드’라고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멀린은 무언가에 홀린 듯했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분명하게 ‘빌리 엘리어트’라고 말했고, 티켓박스 직원도 확인해 주었거든. 아무리 내 발음이 못 알아들을 발음이었어도 말이야. ‘위키드’하고 ‘빌리 엘리어트’하고 어떻게 헛갈리냔 말이야. 게다가 난 왜 티켓을 확인할 생각을 못했을까? 뭐에 홀린 게 틀림이 없어. 아니 얼핏 보긴 봤지. 그런데 ‘Wicked’의 ‘…ed’만 얼핏 보고, ‘Reserved’라고 착각을 했나 봐.


다행히 ‘위키드’ 공연장이 바로 근처라 공연은 늦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어 대사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공연은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한참을 씩씩거렸었습니다. 그런데 ‘위키드’는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직관은 마법의 주문 ‘Wicked’를 멀린에게 알려주려고 그 뒤로도 수도 없이 반복하였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위키드’는 주구장창 따라다니기 시작했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타나서 ‘위키드’해야 한다고 내게 지령을 내렸지. 고개를 돌리면 ‘위키드!’ 우연히 어딘가에 들렀는데 ‘위키드!!’.. 피할 수가 없었어.


한참 만에 끈질기게 쫓아다닌 직관의 메시지를 수용하고 나서도 ‘위키드’는 좀처럼 물러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스톤헨지를 혼자 가야 한다며 스케줄을 흐트러뜨려 놓은 것 입니다. 영국에서는 직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아가는 헛걸음을 용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스도 직면하고 있는가? 버스킹 하다 중단된 적은 있어도, 허탕친 적은 없었는데..


마음이 좋지 않을 한스를 가만두고, 멀린도 조용히 잠자리에 듭니다. 고단한 하루였습니다.

 


눕지 마자 잠이 든 것 같아. 그런데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꿈속에서 내가 다시 스톤헨지의 풀밭에 서 있는 거야. 그래서 혹시나 하고 그 늙은 소를 찾아 보았지. 아니나 다를까. 저만치 떨어진 나무 아래서 하품을 해대고 있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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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담集賢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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