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어처구니없는 믿음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 Berlin, Germany

베를린 장벽은 매우 어이없이 무너졌습니다. 동독 중앙위원회 정보 담당 서기였던 샤보프스키는 언제부터 자유여행이 보장되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얼떨결에 “지금, 즉시”라고 답변해 버립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동베를린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에 모여듭니다. 그리고는 머뭇거리는 국경수비대를 밀고 베를린장벽을 넘어서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독일의 통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 불가능해 보이는 어떤 일도, 사실은 이미 우리 곁에 무르익어 가고 있어. 문제는 그것을 ‘믿음으로 인식하고 있는 가’ 이지. 이미 가능한 일이었던 거야. 담당 서기의 무의식적인 대답 한마디에 무너질 수 있을 만큼 상황은 무르익고 있었던 거야. 물론 끝내 그 한마디를 지켜 냈다면 또 다른 상황이 펼쳐졌을지도 몰라. 거의 다 된 듯 보였던 일도 허사가 되기도 하고,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이 사소한 해프닝 하나로 현실이 되기도 하지. 우리는 그래서 ‘믿음’을 가져야 해.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_ 히브리서 11장 1절


성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相).. 그러나 그렇게 실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이 현실이 되려면 어처구니없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얼떨결일지라도, 어이가 없어 보여도.. 믿음이 실상이 되려면 그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이’가 뭔지 알지? ‘어이’, ‘어처구니’ 말이야. 맷돌을 돌리는 데 필요한 막대기를 말하는 거야. 어처구니가 있어야 맷돌을 돌리지. 그런데 믿음이 현실이 되려면 그 ‘어이가 없어’야 하는 거야. 어이가 있으면 맷돌을 돌리게 되거든. 그것은 일상이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 아니고 보이는 것들의 일상이라고. 현실에 이미 존재하는 그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현실로 가져올 수 없어. ‘어이없는’ 선택과 상황. 그것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지.


현실의 맥락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보이는 것들을 믿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을 믿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보이는 것들은 가서 가져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들은 현실의 방법으로는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현실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그 어이없는 영역에서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적인 것으로 변환되어집니다.


동독의 담당 서기는 어째서 ‘지금, 즉시’라고 말했을까요? 이미 동독인들의 무의식 속에 거부할 수 없는 비현실이 현실화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련과 동구권의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모두가 감지하고 있었고, 동독인들의 무의식에도 그러한 변화의 바람(wind of change)이 불고 있었던 것입니다. 담당 서기 또한 그러한 비가시적인 흐름의 자기장 안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자의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즉시’라고 말이죠. 그 어이없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적 답변 한마디가 동독인들의 믿음을 현실화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자유에 대한 갈망과 믿음이 현실이 되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담당 서기가 체제 수호의 강력한 믿음을 놓지 않고 있었다면 최소한 베를린의 장벽이 그렇게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았을지 몰라. 어쩌면 여전히 우리나라처럼 분단의 현실이 계속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것은 ‘어이없는’, 매우 결정적인 답변 한마디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그래서 체제와 현실을 유지하려고 하는 지배계층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무의식의 에너지가 쌓여가지 않도록 계속 사람들을 현실 속에 묶어 두어야 합니다. 그들의 불만과 불만족이 체제를 부정할 만큼 한 방향으로 몰려가게 두었다간, 한순간에 몰락하게 될 시한폭탄을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믿음, 그러니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체제와 현실 속에서 성취되고 만족되도록 길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믿음은 체제와 현실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바라는 것들이 현실에서 계속 이루어지는데 굳이 비현실적인 믿음을 가질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체제와 현실에서 그것이 가능성을 잃고 부정될 때 사람들의 믿음은 체제와 현실을 넘어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믿음이 체제와 현실에 머무를 때는 통제하기가 쉬워. 체제와 현실이 사라지면 사람들의 꿈도 사라질 테니, 사람들은 체제와 현실을 강력하게 수호하려 들지. 그런데 체제와 현실이 사람들의 바라는 것들을 배신하고, 달성이 불가능하게 만들면, 당연히 사람들은 그 체제와 현실을 넘어서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거야. 우리 시대 사람들의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부동산? 학력을 통한 신분상승? 그런 것들이라면, 그동안 사람들은 체제 안에서 그것들을 성취할 수 있었어. 굳이 체제 너머의 꿈을 꿀 필요가 없었던 거야. 그러나 그 방식이 좌절되기 시작하고, 그 절망의 에너지가 쌓여가면,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기 시작하지. 체제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한 믿음을 말이야.


그렇게 체제와 현실은 물이 차고 기울어지는 것처럼 계속 혁명되어지고 바뀌어 왔습니다. 반대로 그러한 사람들의 ‘바라는 것들’을 체제 내에서 실현 가능하도록 열어 놓은 사회는 500년, 1,000년씩 자신의 시스템을 유지해 오기도 합니다. 결국 사람들의 바라는 것의 현실화(실상화)가 체제 유지의 관건인 것입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야.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모두 현실화하고 있다면 사람은 꿈이나 믿음 같은 것들을 가질 필요가 없어. 그러나 그렇게 만족스러운 삶이 얼마나 되겠어? 대부분은 믿음의 저편, 꿈속 깊은 곳 어디에 ‘바라는 것들’이 잠들어 있지. 그것들이 현실화되려면 과정이 필요해. 믿음이 자라나는 과정. 동독인들이 주변 상황의 변화로 인해 점점 믿음을 키워갔듯이 개인의 믿음 또한 에너지를 쌓는 과정이 필요해. 그것은 ‘간절함’을 먹고 자라지. 하지만 아무리 폭발 직전까지 믿음을 키웠어도, 결정적인 선택이 없으면 그것은 현실로 가져올 수가 없어. 바로 그 순간 진짜 믿음이 필요한 거야. 왜냐면 ‘어처구니’가 없이 맷돌을 돌려야 하니까.


우리는 그 모든 믿음과 꿈의 현실화를 열망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는 그놈의 ‘현실성’을 끄집어 듭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야 기적이 일어나는 데, 사람들은 그 기적의 순간을 향해 가는 도중에 ‘어처구니 없네. 이게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해? 어처구니가 없는데 맷돌이 돌아가겠냐?’라고 하며 걸음을 멈춰 버립니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는 건 그대의 꿈과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 온 그대의 염원과 열망들입니다. 가능한 것은 믿음이 아니며, 믿음은 어차피 불가능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인데, 그것을 현실로 가져오겠다는 사람이 현실 가능성의 잣대로 선택을 멈춰버리면 어쩌자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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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담集賢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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