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닥치고 날 좀 구해줘

+ Nuremberg, Germany

독일에 들어섰습니다. 계속되는 캠핑이 이제 좀 지겹기도 합니다. 편안한 숙소에서 하루쯤 여독을 풀어도 좋겠습니다. 베를린까지 한 번에 달려가기에는 조금 먼 거리라 중간에 뉘른베르크에서 하루 쉬어가기로 합니다. 다행히 저렴한 가격에 아파트먼트를 렌트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욕조와 거실, 넓은 부엌이 달린 아파트먼트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와~우, 좋네. 사람이 이런 데서 살아야지.”


다들 살짝 흥분하며 깨끗하고 넓은 숙소에 만족합니다. 불편한 식사 준비에 고생이 많았던 한스와 잭은 요리기구와 각종 식기가 잘 갖춰진 부엌에 대만족입니다.

 

“이런 날 술이 빠질 수 없지. 독일 하면 맥주 아니겠니. 맥주 사러 가자!”


장을 보러 가야겠습니다. 맛있는 독일 맥주가 곁들여진 근사하고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내 마트에 들러 장을 봅니다. 아차! 시간이 좀 늦었군요. 일찍 점포 문을 닫는 유럽 마트들을 생각해 서둘러 마트에 들러 봅니다. 생각보다 맥주가 별로 없습니다. 아마도 술만 따로 파는 매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럽은 나라마다 주류 판매에 대한 정책이 다릅니다.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술을 판매하지 않는 곳도 있고, 전문매장에서만 주류를 구입해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술 문화는 한국만큼 자유로운 곳도 드문 것 같습니다.

 

“맥주가 생각보다 종류가 별로 없네요.”
 
“여기가 전문점이 아니어서 그럴 거야. 그래도 맛은 봐야지.”


유명하다는 메이커들은 찾아볼 수가 없고 현지산으로 보이는 몇몇 종류만 눈에 띄입니다. 일단 사고 봅니다. 매장이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인간다운(?) 공간에서의 식사인데 술이 빠질 수는 없습니다. 세 사람 모두 양손 가득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갑니다.

 

“아쉽다. 다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누구요? 다른 멤버들이요?”
 
“응. 내 직관에는 왠지 이번 여행의 정원이 6명이었을 것 같단 말이야. 3명이 안 온 거지.”


남은 3명은 누구였을까요? 누군가는 태초부터 이번 여행에 초대되어 있었습니다. 부름에 응답한 건 멀린과 한스, 잭이었지만 6명 또는 밴드가 깨어지지 않았다면 10여 명의 팀원이 이번 여행에도 함께 했었겠지요.

 

“지난 미국투어 때 내가 물어봤었어. 다음번에는 어디로 버스킹을 갔으면 좋겠냐고 말이야. 그때 누가 스위스라고 했어. 그래서 이번 여행 일정 짜는데 스위스는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지.”
 
“그게 누군데요?”


멀린은 여기 오지 않은 멤버 중 1명이었는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누군가의 무의식 속에 이 팀의 다음 행선지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위스를 말한 누군가는 이번 여행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우주는 갈라졌습니다. 이들은 같은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나 같은 우주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스와 잭은 스위스를 거쳐 독일에 와있고 다른 이들은 한국에 머물러 있습니다. 남은 이들은 버스킹 투어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고, 떠나간 이들은 자신들의 우주를 구축해 가고 있습니다.


우주가 달라지면 우리는 서로의 기억에 의존해서 소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 속 서로는 현재의 인물이 아니라 과거의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닙니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누군가들은 실체가 없습니다. 그것은 나의 왜곡된 기억 속에서 편집되어진 캐릭터일 뿐, 실재의 누군가가 아닙니다. 같은 공간에서 24시간을 함께 지내도 동상이몽 하는데, 기억 속의 그들이 지금의 나와 소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그냥 어젯밤 꿈속에 만난 누구보다 왜곡된 허상입니다.

 

“어! 카톡 왔어요. 은미한테서요.”
 
“정말?”
 
“와~우. 이건 뭐지? 무슨 국면으로 들어가는 거지. 형 빨리 읽어봐요!”


은미는 떠나간 멤버 중 한 명입니다. 은미는 밴드가 깨어진 뒤에도 한동안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밴드를 떠난 뒤에도 한스와 연락을 끊지 않고 계속 상호작용을 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6개월 전쯤부터 아무 이유도 없이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합니다. 한스가 계속 카톡을 보내도 읽지 않고 무응답 상태가 계속 되어오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면서도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카톡이 온 겁니다. 그것도 매우 긴 장문의…

 

“뭐라고 썼어요? 잘 지낸데요?”
 
“읽어보지 말까? 나도 씹어볼까 봐. 한 6개월쯤.”
 
“형, 쪼잔하게~~”


큭 어찌 읽어 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서운하긴 하겠지만 한스가 그동안 기다려 온 시간의 무게가 그냥 뻗대 볼 만큼 가볍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읽어 봐야겠지?”
 
“그럼요. 아~ 궁금해 죽겠네.”
 
“그럼 읽어 보마. ‘안녕하세요. 오빠 잘 지내셨죠. 은미에요…..’ ”


카톡 치고는 제법 긴 장문의 내용입니다. 읽어 내려가는 한스의 목소리가 점점 톤 다운됩니다. 다들 기대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가 예상치 못한 내용에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모두들 이 의외의 상황에 기대하는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여행의 흥미로운 반전의 계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팀의 멤버십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지 않을까? 남은 자들의 마음은 기다림입니다. 버려진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중이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은미는 팀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만큼 영향력이 큰 멤버였어. 은미의 탈퇴와 합류 여부가 다른 멤버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끼쳤지. 존재감이 컸던 탓에 한스도 기대하는 마음을 접지 않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데 뭐랄까? 이번 메시지는 그냥 ‘내 장비 돌려주세요.’ 였어.


은미는 밴드에게 자기장비를 빌려 주었었나 봅니다. 그동안 왜 연락을 할 수 없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구구절절 길게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 용무는 빌려 간 장비를 돌려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스에게는 공식적인 이별선언처럼 들렸을 거야. 6개월을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문자 해서 장비를 돌려달라는 이야기가 말이야. 마치 이별하는 연인이 얼굴도 대면하지 않고, 문자로다가 자기 서운한 감정만 잔뜩 쏟아놓고는 내가 그동안 사준 선물 돌려달라는 듯이 느껴졌을 테니 말이야.


카톡을 다 읽어 내려간 한스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아무 표정도 없습니다. 물론 잭도, 멀린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트렁크에 잔뜩 실린 맥주와 음식재료들이 무안해 하며 바스럭거릴 뿐입니다.

 

“장비 돌려달란 얘기네요. 우리 여행 중인 거 몰랐나?”
 
“그러게. 여행 중이어서 돌려줄 수가 없다니까, 그럼 자기 장비를 내가 사고 돈으로 달래. 새 거 사게.”
 
“왜 하필 이 타이밍이었을까? 그리고 6개월이나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불쑥 연락해서 장비를 돌려달라고 할 만큼 비싸고 중요한 장비인가? 그게?”
 
“글쎄요. 뭐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한스에게는 매우 직관적인 상황임에 분명해. 어쨌든 더 이상 그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으니까. 이별선언 같은 거를 당했으니, 설득해서 돌려놓던지 아니면 수용하던지 해야 할 타이밍이 되어버렸어.


결국 숙소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워져 버렸습니다. 다들 애써 내색도 하지 않고, 농도 던지고,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지만, 쉽게 잊혀지고 가라앉을 감정이 아닙니다. 결국 무거워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건 잭이었습니다.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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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담集賢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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