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보상은 흔쾌하게

+ Zurich, Swiss

밀라노를 거쳐 스위스로 들어왔습니다. 스위스, 환상적인 풍경이 연이어 펼쳐지는 여기는 별천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속도로 좌우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와 저 멀리 보이는 만년설이 하모니를 이루며 차창 밖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멀린과 한스는 스위스가 처음이 아니었음에도, 입이 딱 벌어지는 풍경에 눈이 호강을 하는 듯합니다. 스위스, 아니 유럽여행이 처음인 잭은 얼마나 더 놀라울까요? 그런데 생각보다 잭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잭, 스위스야, 스위스라고 이 풍경 좀 봐! 대단하지 않니?”


한스가 너스레를 떨며 잭의 동향을 살핍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멀린도 한마디 거듭니다

 

“그러게, 잭은 스위스 처음 아니니?”
 
“아.. 예 좋네요.”


무슨 일이 있는가 봅니다. 감정 표현이 적극적이지 않은 편이긴 하지만, 자연 풍경을 보면 ‘이거 실화냐?’며 오버스러울 정도로 감탄하곤 했던 평소의 잭 같지가 않습니다. 반응이 의아한 한스가 집요하게 캐물어 봅니다.

 

“왜~ 왜 그러는데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에요.. 별거 아니에요.”
 
“에이~ 무슨 일 있구만. 말해바말해바말해~바. 답답하잖아. 말하고 풀자.”
 
“아니 뭐 별거 아닌데..”


별거 아니었습니다. 잭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일은 별게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일상 같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잭에게는 참으로 짜증 나는 일이고 마음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별거 아닌 일은 이렇습니다. 잭은 이번 여름과 하반기에 예상치 않게 이런저런 일로 해외여행을 여러 번 가게 되었습니다. 이번 유럽여행을 마치고도 한 달 뒤에 바로 교회 청년부에서 중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정이 잡혔습니다. 잭은 교회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그리 사교적이지 않은 성향임에도 적극적으로 행사에 참여하려고 한답니다. 그런데 뭐 인디뮤지션이 돈이 얼마나 있어서 경비를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비행기값 정도 부담하면 되는 금액이어도 연이은 일정에 경비를 마련하기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잭은 별 걱정 없이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여행 경비 마감 일정이 갑자기 앞당겨져서 부모님께 급작스럽게 SOS를 쳤나 봅니다. 물론 이미 얘기가 다 되어있던 일이었습니다.

 

“아니 아버지가 ‘돈 안 주면 안 갈 거니?’ 그러시는 거예요. 짜증나게.. 주기로 다 얘기해 놓구선."
 
“그거야 아버지께서 그냥 너랑 얘기를 더 하고 싶어서 그러신 거지. 안 주시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왜 그러냐구요? 줄 거면 그냥 주면 되지. 왜 이말 저말하게 만드냐는 거죠.”
 
“가족끼리 얘기 많이 하면 좋지 뭘 그러니. 그냥 네가 아버지 덕분에 여행 잘 다니고 있어요. 감사해요. 이런 말도 하고 중국여행도 잘 다녀올게요. 하고 그럼 되지. 싹싹하게, 아들이 말야.”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꼭 이런 식인 게 싫은 거죠. 엄마는 심지어 기도해 보래요. 참~나.”


한스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뭐 누구라도 이해가 잘 가지 않을 상황이긴 합니다. 잭의 부모님께서 경비를 안도와 주시려고 하는 것이 아닐 거라는 건 누구나 알만한 상황이니까요. 그런데 멀린은 잭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내향사고형인 멀린과 잭은 사실 이렇게 상황이 급작스럽게 변경되고 심지어 그것 때문에 어떤 말을 하게 되는 상황이 갑갑합니다. 내향사고형에게 정서적 상호작용은 귀찮고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융의 심리유형론에 의하면 잭은 에너지를 내부로 계속 충전하면서 생활을 해야 하는 유형이야. 쉽게 말해서 이런 유형은 1년쯤 쓴 핸드폰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충전기에서 뽑는 순간부터 바로 배터리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지. 그래서 늘 충전기에 꼽혀 있고 싶어 해. 충전기는 주로 쇼파와 방바닥, 의자에 고정되어 있지. 말하고 상호작용하는 자체가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일이야. 반면에 외향형이나 감정형들은 끊임없이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데서 에너지를 얻어. 발전기처럼 말이야. 그래서 자꾸 감정 교류를 하고 싶어 하지. 여행 중에 보니 한스는 외향형이라 에너지가 넘쳐 쓸 데를 찾아 헤매고, 잭은 내향형이라 틈만 나면 멍 때리고 싶어하더군. 잭은 한스를 맞춰주느라 애를 쓰는 것 같은데 한스에게는 택도 없는 것 같더라구. 둘 다 힘든 거지 뭐. 나도 내향사고형이라 잭 심정을 아주 잘 알지.


잭은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부모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런 상황 자체가 짜증이 나는 겁니다.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이미 합의된 내용이 흔들릴 것 같은 상황. 물론 자기 돈 맡겨 놓은 것도 아닌데, 부모님이 안 주신들 할 말이 없지만, 이미 여행 오기 전에, (그 힘든) 대화와 상호작용 끝에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툭 던져놓았을), 잭은 자신이 할 만큼 했고, 허락을 이끌어 내어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어차피 주실 거면서 또 상호작용을 하자고 하는 부모님의 반응에 짜증이 난 것입니다.

 


어쩌겠어. 아쉬운 놈이 알아서 기어야지. 하지만 벌써 여행이 반환점을 돌았고, 내향형에게 숨을 틈도 없이 45일을 24시간 내내,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야. 그러니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물론 할 수만 있으면 혼자 있으려 드는 내향형들과 지내야 하는 외향형 한스도 힘들긴 마찬가지였겠지만.. 어떤 때는 내향형 둘이 상호작용을 잘 안 해 주니까, 나무 기둥에다 줄을 매고는 혼자 씨름을 하고 있더라구.


여행이 쉽기만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순례 여행은 목숨을 걸고 하기도 하는데, 이정도 스트레스 감내할 만 합니다. 그럼에도 이제 여행의 중반에 접어들었으니 좀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멀린은 일단 스위스에서 한 숨 돌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한스와 잭에게 자유여행을 제안합니다. 그래서 한스와 잭은 융프라우에 올라가기로 하고 멀린은 취리히를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멀린은 스위스가 처음이 아닌 터라 알프스에 올라갈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했고, 또 취리히에서 나름 둘러보고 싶은 곳들이 있어서 융프라우에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행 중 처음으로 일행과 분리되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욕구가 더 컸지만 말입니다.

 


아이고.. 나도 숨 좀 돌려야지. 군대도 아니고 24시간 내내 사내놈들이랑 말이야.


잭에게는 좀 미안합니다. 잭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할 텐데.. 그리고 한스의 넘치는 에너지를 홀로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스위스까지 왔는데 알프스 산에는 올라가 봐야지요. 잭은 부모님 때문에 상한 마음에다가 한스의 넘치는 에너지까지 홀로 떠안고는.. 어쨌든 융프라우에 가기로 합니다.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혼자 돌아 다니까 살겠더라. 군대에서 휴가 나온 느낌이었어. 혼자면 외롭고 같이면 괴롭고..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선택의 문제지.


외로울 것인가? 괴로울 것인가? 사람들은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지는 못하고 늘 외로웠다 괴로웠다를 반복합니다. 뭐 뾰족한 수가 없는 인생의 필수 구성요소입니다. 그것이 찬물, 더운물일 테고, 그 뜨거운 용광로와 차디찬 얼음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우리의 영혼이 정금, 현자의 돌이 되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혼의 연금술, 별거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삶의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현자의 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긴장만 많은 터라 이완이 중요합니다. 주의 깊게 적절히 이완을 해주지 않으면 까맣게 타버리고 말 겁니다. 충분히 뜨거워지면 반드시 찬물에 담가 이완을 해주어야 합니다.

 


사실 매우 이완이 필요했어. 긴장상태가 계속되고 있었거든. 관계의 스트레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남은 일정과 경비에 대해서 아직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어. 아니 아무 직관을 얻지 못하고 있었지. 싸인이 나지 않아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고 있는데 계속 속도가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할까?


멀린 홀로 감당하고 있는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누어 질 수 있는 짐이 아니고, 오로지 멀린 혼자 결정하고 감당해야 할 사항입니다. 멀린은 계속 직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아무런 싸인도 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무거운 마음과 관계의 스트레스에서 잠시 벗어나 취리히를 거닐어 봅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듯합니다.

 


별생각 없이 취리히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츠빙글리’ 동상이 나타나더군. ‘츠빙글리’ 몰라?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 말이야.


스위스는 ‘마틴루터’의 독일과 함께 종교개혁의 진원지였습니다. 제네바의 ‘칼빈’과 취리히의 ‘츠빙글리’는 대표적인 스위스의 종교개혁자로, ‘칼빈’에 비해 ‘츠빙글리’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있습니다만,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받아 ‘칼빈’이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츠빙글리’는 실천을 강조한 개혁가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동상에는 성서와 함께 검이 들려 있습니다. 당시 스위스의 부정부패는 곪을 대로 곪아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츠빙글리’를 가장 분노케 한 건, 스위스 용병들이 목숨을 걸고 벌어 온 돈을 착취하여 자신들의 호의호식에 사용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스위스는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이렇다 할 산업이 없이 숙박업과 용병 파병으로 나라가 유지되고 있었어. 그래서 용병들은 자신들의 수입이 가족과 나라의 수입이므로 최선을 다해서 전투에 임했지. 무엇보다 고용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을 다했는데, 그래야만 자신들의 후배들이 계속해서 용병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 심지어 프랑스 혁명 때는 루이 16세와 마리앙트와네트를 지키던 용병들에게 시민군이, 당신들은 프랑스인이 아니니 비켜주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자신들은 고용인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며 끝까지 항전하여 768명 전원이 전사하기도 했지.


루체른에는 스위스 용병을 기리며 바위에 조각된 ‘빈사의 사자상’이 있습니다. 그들의 용맹과 충성스러운 마음이,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 뭉클하게 하는, 매우 슬프고 처참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상입니다. 멀린은 ‘빈사의 사자상’ 앞에서 마음이 찢어지며 가슴이 저며 옵니다.

 


뭐랄까? 숭고함이 파도처럼 덮쳐온다고 할까? 신념을 다하는 삶의 궁극을 본 듯했어. 그게 무엇이든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지켜내는 신념은, 정말 강한 힘을 가지는 것 같아.


멀린은 취리히의 ‘츠빙글리’와 루체른의 ‘빈사의 사자상’이 오버랩 되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젖어 듭니다. ‘츠빙글리’는 군종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스위스 용병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숭고한 죽음으로 얻은 보상을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호의호식하며 가로채는 모습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스위스의 죄악, 악덕, 불신앙성, 외국 숭배와 이것이 조국의 자녀들을 집어삼키는 것에 대해서>라는 분노의 글을 발표하고 용병제를 반대하며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실천적 개혁가였던 그는 뒤로 물러나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의 한복판에서 직접 전쟁에 참여하여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그의 시체는 적에 의해 4등분되어 불태워졌습니다. 그의 나이 47세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적들은 부패한 종교지도자들과 결탁한 용병 업자들이었습니다.

 


스위스 용병들의 신용은 점점 더 유명해져서 교황청을 비롯하여 여러 왕실과 국가의 호위병으로 고용되었어. 그리고 그들의 고용인에 대한 절대 신용이 지금의 스위스 금융업의 토대가 되었지. 결국 별다른 산업 토대가 없는 스위스가 지금의 부와 재산을 획득할 수 있었던 데에는 스위스 용병들의 절대적인 헌신과 숭고한 희생이 있었던 거야.


헌신과 희생에는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츠빙글리’는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가족과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용병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은커녕, 그들의 보상을 가로채는 종교지도자들의 악덕을 가만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보상 없는 수고에 지친 멀린은 불현듯 잭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융프라우에서 돌아오는 잭과 한스를 픽업하러 가는 길이었어. 갑자기 잭의 말이 떠오르는 거야. 여행 초반에 잭은 올 초에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신 분이, 네가 곧 보상을 받게 될 거라고 하셨다고 했어. 잭은 그 보상이 이 유럽 버스킹 여행인 것 같다고 했지. 보상이라.. 나는 불현듯 보상은 이런 식으로 주어져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뭐랄까? 보상은 흔쾌하고 분명해야지. 또 다른 수고와 스트레스가 있어선 안 되는 거야. 그건 아주 정말 짜증 나는 일이야.


멀린은 순간 직관이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유럽여행이 잭에게 주어져야 할 보상이라면, 그것을 수행하는 자신이 그에게 흔쾌하고 흡족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직관은 세 가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잭의 중국 여행경비 40만 원을 멀린이 줄 것, 그리고 융프라우 경비 또한 멀린이 지불할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여행을 계속할 것이었습니다.

 


융프라우는 일정에 없었던 자유여행이라 개인경비로 각자 부담하기로 했었거든. 그런데 직관은 내가 부담해야 한다고 하더군. 물론 한스의 경비까지 말이야. 순간 살짝 흔들렸지. 야.. 이거 추가 지출이 만만치 않은데.. 그냥 무시할까 하는 찰나였어.


직관은 여지없이 멀린의 차를 막아섰습니다. 갑자기 자동차 한 대가 멀린 앞으로 끼어들더니 번호판을 번듯이 내보이는 겁니다. [0W800000] 세상에 이런 번호판이 또 있을까요? 80만 원. 두 사람의 융프라우 경비와 잭의 중국 여행경비를 정확히 합친 액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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